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2014)’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한 남자의 일대기를 통해,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시대적 아픔과 가족 중심의 희생적 가치를 담아낸 감성 드라마다. 흥남철수, 독일 파독 광부, 베트남전 파병, IMF 경제위기 등 굵직한 사건 속에서 주인공 덕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다. 영화는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감춰졌던 세대의 눈물과 무게를 현실감 있게 풀어내며, 관객의 공감과 눈물을 자아낸다. 단순한 회고를 넘어, ‘기억’과 ‘책임’, ‘사랑’이 무엇인지 되묻는 이 작품은 한국형 멜로드라마의 완성형으로, 부모 세대에 대한 존경과 후대의 성찰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흥남에서 시작된 한 남자의 약속, 그리고 평생의 무게
‘국제시장’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 작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수많은 피난민들 속에서 어린 덕수는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만 간신히 부산 국제시장 인근에 자리를 잡는다. 덕수는 그날 아버지와 나눈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산다. “가족은 네가 지켜라.” 이 한 문장이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념이 된다. 영화는 이후 덕수의 삶을 연대기 형식으로 따라간다. 가난한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독일로 떠난 파독 광부 시절, 탄광 속에서의 죽음과 삶을 오가는 고된 노동, 그곳에서 만난 평생의 짝 영자와의 만남. 그리고 전쟁터와 다름없던 베트남 파병, IMF 시대의 구조조정과 상실까지. 각각의 시기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이며, 덕수는 이 모든 격변의 한가운데에서 언제나 묵묵히 가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아낸 ‘개인의 표정’이다. 덕수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그는 그저 아버지가 남긴 말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 평범함 속에 담긴 선택과 책임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영화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특히 국제시장에서 가게를 지키며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 사소한 오해, 그리고 결국 서로를 향한 믿음과 화해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의 핵심 질문을 품고 있다. 덕수는 삶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그것이 결코 희생만은 아니었음을, 그는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방식’이었음을, 영화는 절제된 방식으로 감동적으로 전한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국제시장’의 구조는 한국 현대사의 연대기와 덕수의 삶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것은 단지 서사의 편의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시대가 개인을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개인이 어떻게 시대를 견뎌냈는지를 묻는다. 즉, 덕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자’이자 ‘역사를 이룬 자’다. 광산 갱도 속에서 친구를 잃고, 베트남에서 총탄이 오가는 가운데 부상당한 동료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은 ‘개인’의 목숨이 얼마나 쉽게 휘둘렸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덕수는 그 모든 순간에도 ‘내가 무너지면 가족이 무너진다’는 책임감 하나로 버텨낸다. 이는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 부모 세대가 선택한 보통의 방식이었다. 영화가 인상적인 지점은, 그러한 책임이 과연 정당했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수는 끊임없이 참고, 양보하고, 떠난다. 자신의 삶보다 가족의 안녕을 우선하며, 개인의 꿈은 뒤로 미룬다. 오늘날 관객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때로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그 시대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써 조명한다. 또한 ‘국제시장’은 단지 남성 중심 서사로 머물지 않는다. 영자는 당시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이중의 부담을 함께 보여준다. 독일 간호사로서의 헌신, 시어머니와의 갈등, 자녀 양육에 대한 고민 등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덕수와 함께 시대를 이끈 또 다른 중심축이다. IMF 당시 덕수가 일자리를 잃고, 오랜 꿈이었던 가게를 접으며 스스로를 비난하는 장면은 그 모든 삶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는 대사는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절절한 목소리다.
기억하는 자와 살아가는 자, 우리가 계승해야 할 유산
영화 ‘국제시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덕수가 다시 흥남 부두의 꿈을 꾼다. 부두 위, 멀리서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이 손을 흔든다. 그는 달려가지만 닿을 수 없다. 이 장면은 단지 한 남자의 그리움을 넘어서, ‘기억이 만든 공간’이며, 끝내 돌아갈 수 없는 상실의 상징이다. 영화는 결코 영웅담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덕수는 특별한 능력도, 거창한 철학도 없지만, 삶을 선택하고 감당하며 걸어왔다. 그 과정은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보편적인 이야기이며, 그래서 더욱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영화는 눈물을 강요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관객은 자신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국제시장’은 결국 질문을 남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단지 과거를 추억하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남긴 가치를 오늘의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되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기억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 ‘국제시장’은 그런 대답을 간직한 영화이며,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람들의 초상이다. 그리고 그 초상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넌,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