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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확신의붕괴/관객의몫-‘살인의추억’

by kkunzee 2025. 7. 24.

 

봉준호감독의2003년작‘살인의추억’은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실제미제사건을모티프로,80년대한국사회가안고있던폭력과무력,그리고억압된개인의얼굴을정밀하게그려낸경찰스릴러다.영화는웅덩이처럼침묵하는논두렁과끊임없이내리는비를배경으로,진실을찾겠다는의지와무능력의늪사이를허우적대는두형사의분투를그린다.그러나범인의정체보다더중요한것은시간이흐를수록점점증폭되는‘확신의결여’와‘공포의일상화’다.불확실성속에서무너지는수사과정,폭력에의존하는국가장치,그리고시스템의균열을직시하는냉혹한시선은한국장르영화의새로운지평을열었으며,관객에게“우리는과연무엇을믿고살아가는가”라는본질적질문을던진다.결국‘살인의추억’은단순추리극을넘어사회의그늘과개인의한계를동시에사냥하는진한휴머니즘스릴러로기억된다.

비가내리던밤,첫시체와마주한순간

1986년경기도농촌,끝없이이어지는논두렁사이에비에젖은여인시체가발견된다.영화는이장면에서부터관객을질척한공기속으로끌어들인다.카메라는사체를엎드려살피던박두만형사의불안한눈빛을비추고,멀찍이서천천히접근하는경운기의쇳소리가정적을가른다.시골파출소의형사들은현장을보존할개념도전문장비도없다.신발자국을계속밟아지우고,초등학생들은호기심에굴과풀숲을헤집는다.영화는초반부터‘수사의시작점’이얼마나불완전했는지를현실적으로묘사함으로써다음전개가지닐모순과충돌을예고한다.박형사는직감과폭력에의존하며용의자를찾고,시청각장애인소년을범인으로몰아가려한다.반면서울청에서파견된서태윤형사는증거와절차를강조하지만,파출소내낡은책상들과낙후된기록체계는그의전문성을쉽게조롱한다.둘은공동의목표를앞에두고도“어떻게수사를진행해야하는가”라는방법론을두고끊임없이충돌한다.이때브라운관속뉴스에서는정권홍보와경제성장수치가쏟아지지만,화면밖시골동네는가난과불안을가리기위해빛바랜마을운동회를열고,경찰의그늘아래인권은허락되지않는다.감독은이런배경들을속도감있게배치하여단순범죄추적극으로흘러갈수있는줄거리에농밀한사회적질감을부여한다.서사는외형상‘연쇄살인범을찾는과정’이지만,실제로는거대한체제와개인적무능,그리고폭력적학습이서로엉켜들며어디에서도답을찾을수없는지점으로관객을몰아넣는다.결국첫시체앞에서느낀두려움과혼란은시간이흐를수록형사들뿐아니라관객에게도옮아붙으며,“우리는무엇을보고싶어하는가”라는불편한자문을남긴다.

 

추적의미로,폭력의굴레,그리고확신의붕괴

영화중반부는연쇄살인이반복되면서박두만과서태윤의수사방식이급격히흔들리는과정을교차편집으로담아낸다.비오는밤,빨간옷을입은여성,그리고20시정각라디오에서흘러나오는‘비가온다’라는노래가사—범죄패턴은선명하지만범인은점점더흐릿하다.현장에서채취한체모와지문은국과수로보내지는도중분실되고,공포에질린주민들은헛소문을퍼뜨린다.형사들은초조함을달래기위해용의자들에게폭력을휘두르며‘자백’을짜맞춘다.여기서봉준호감독은폭력수사가태생적으로가지게되는자기기만성을적나라하게보여준다.고문당하던용의자는때로명백한증거처럼보이는가짜시나리오를불어놓고,형사들은‘우리가드디어해냈다’는흑백논리로자신을설득한다.그과정에서형사들의눈빛은희열,두려움,무력감을번갈아가며드러내어관객을불안정한정서로몰아넣는다.특히지하실에서형광등이깜빡이는가운데박형사가장애인용의자를협박하는장면은‘국가폭력’과‘개인폭력’이구별되지않는순간을표현한다.한편서태윤은끝내“Youknowwhatimean?”이라며영어로감정을폭발시키는장면을통해,체계적수사가현실적한계에부딪힐때전문수사관역시인간적분노에굴복할수밖에없다는모순을노출한다.또다른전환점은DNA키트의부재다.현대적시각에서보면단서해결이쉬웠을사건이당시에는‘기술의빈틈’때문에미제로남는다.관객은이시차적아이러니를통해과학수사의필연성과역사적한계,그리고사건해결에서운이차지하는비율을다시생각하게된다.결국범인을쫓는선형서사는점점갈피를잃고,모든단서는사람이아닌‘시간’에의해지워져간다.마지막에형사들은논두렁배수로에서또다시발견된시체앞에서무릎을꿇고카메라를노려보지만,그눈빛은분노도아니고슬픔도아닌‘공허’다.사냥은계속되지만사냥꾼은이미길을잃었고,관객은이땅에스며든폭력의기원을묻고싶어도도망칠수없다.

 

끝나지않은추억,범인없는미소,그리고관객의몫

영화마지막,세월이흘러형사복을벗고가족과함께살아가는박두만은우연히살인현장을다시찾는다.논둑에는더이상경찰테이프가없고,아이들은웃으며뛰놀며,“어떤아저씨가옛날에여기서뭔가했대요”라고말한다.박두만은카메라정면,즉관객을향해시선을돌리고,살짝웃는다.그웃음엔후회,무력감,자조,그리고어쩌면“너는범인을봤느냐”라는무언의질문이섞여있다.봉준호는이장면으로사건의종결이아닌‘기억의계속’이라는새로운지점을열어젖힌다.관객은범인을보지못했지만,범인이어디엔가존재한다는사실은영화밖현실에의해증명된다.2019년진범이검거되었을때,영화는새로운해석의무대를맞이했다.그러나정작‘살인의추억’이던지고간질문은여전히유효하다.개인이만든악인가,사회가만든악인가,혹은둘의합작인가.영화는명쾌한답을주지않는다.대신관객각자가일상에서만나는사소한폭력,묵인된차별,그리고조용한무관심을돌아보게한다.여전히누군가는비오는밤논둑을걸을것이고,누군가는두만처럼카메라를들어자신을응시할것이다.봉준호의카메라는그사람들사이에놓여있다.결국‘살인의추억’은미제사건범인을찾는영화가아니다.그것은‘사회가왜범죄를만드는가’라는물음의추적기이고,관객에게“당신은지금어디에서있나”를재차확인시키는어두운거울이다.길고축축한비가그친뒤에도,우리는그비를기억해야한다.그것이영화가남긴숱한추억중가장무거운방울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