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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플렉/조커/비정상] 영화<조커>리뷰

by kkunzee 2025. 7. 23.

 

광기와 사회의 경계, ‘조커’가 들이민 불편한 거울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Joker, 2019)’는 DC 코믹스의 악당 조커라는 캐릭터를 원점에서 해석한 영화로, 기존 히어로물의 문법을 철저히 탈피한 심리 드라마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아서 플렉은 점점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결국 광기의 아이콘 ‘조커’로 변모해간다. 이 영화는 단지 범죄자의 탄생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회 속에서 인간성의 파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조커는 악당이기 이전에, 시대가 만든 비극적 산물이다. 영화는 사회적 책임, 정신 건강, 계층 갈등 등 다양한 담론을 제기하며,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진짜 ‘광기’인가? 우리는 과연 정상인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남자, 아서 플렉

‘조커’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외형을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철저하게 인간 심리와 사회 시스템의 균열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을 꿈꾸는 무명 연기자이자, 어머니를 간병하며 살아가는 빈곤한 남성이다. 그는 웃음을 주고 싶어하지만, 정작 세상은 그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사회복지 혜택은 끊기고, 정신과 상담은 중단되며, 약조차 처방받지 못한 채 일상은 점점 망가져간다. 아서의 특징적인 행동 중 하나는 통제되지 않는 웃음 발작이다. 이 웃음은 영화 내내 반복되며, 관객에게 ‘웃음’이라는 감정의 복잡성과 왜곡을 전달한다. 웃음은 원래 행복의 표현이지만, 이 영화에선 아서의 고통과 억눌림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의 웃음은 점차 진짜 웃음이 아닌 ‘가면’으로 변화하며, 마침내 ‘조커’라는 정체성으로 탈바꿈한다. 이 영화의 서사는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게,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아서의 일상과 무너짐을 묘사한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서라는 인물을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게 만든다. 그가 처한 환경, 그가 받은 상처, 그가 겪는 고립감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무심히 지나쳐온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다. 특히 영화의 전반부는 ‘비극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서가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부당하게 폭력을 당하고, 조롱받고, 이용당하는 장면은 사회적 약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는 이처럼 조커라는 상징을 ‘태어나는 과정’에 집중하며, 그가 어떻게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조커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조커’의 진짜 공포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처음엔 관객도 그를 동정하거나 이해하며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그의 폭력성과 복수심, 점차 확장되는 광기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 감정의 전환이 바로 영화의 진짜 주제다. 우리는 언제까지 ‘피해자’에게 동정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바뀌는가? 아서의 폭력은 처음에는 ‘자기방어’처럼 보인다. 지하철에서의 총격 사건은 명백히 방어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이후부터 그는 그 행위에서 쾌감을 느끼고, 점점 능동적인 폭력을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 영화는 ‘폭력의 쾌감’이라는 불편한 주제를 건드린다. 사회적으로 억압된 이들이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해방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결코 허구로만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영화 속 고담시는 철저히 계층화되어 있다. 상류층은 타워 안에서 고립되고, 하층민은 지하철과 뒷골목을 떠돈다. 이 계급 간의 단절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서가 토머스 웨인(브루스 웨인의 아버지)과의 관계를 오해하게 되는 서사는 단지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상류층이 하류층을 어떻게 소비하고 무시하며, 때로는 철저히 배제하는지를 상징한다. 또한 영화는 언론과 대중문화의 역할도 비판한다. 아서는 토크쇼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결국 그 방송에서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 장면은 조커라는 캐릭터가 단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외면한 자의 얼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내뱉는 대사는 강렬하다. “당신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짓밟고, 죽음조차 구경거리로 만든다.” 이 영화는 ‘악’이란 단어를 재정의한다. 조커는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위선과 무관심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는 단순히 한 사람의 타락이 아닌, 사회 전체의 붕괴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불편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누구를 비정상이라 부를 수 있는가?

‘조커’의 마지막은 조커가 태어나는 장면이자, 아서 플렉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가 붉은 수트를 입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출 때, 우리는 누군가의 절규를 보고 있는 동시에 누군가의 해방을 목격하고 있다. 그 장면은 아름답고, 동시에 끔찍하다. 이 모순적인 감정이 바로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질문이다. 아서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미쳐버린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이 경계를 일부러 흐린다. 우리는 그를 악당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피해자로 보아야 할까? 혹은 둘 다일까? 이러한 질문은 관객 각자의 삶의 경험과 도덕적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이 영화의 정점이다. 그의 말라버린 체형, 흐느끼는 듯한 웃음, 흐트러진 춤은 조커라는 캐릭터를 인위적인 과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그는 조커를 ‘공감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공감하기에 더 무서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내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조커’는 단지 캐릭터의 탄생기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해온 사람들,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소리를 담아낸 영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단지 영화 속 고담시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곳곳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오늘 누구의 울음을 지나쳤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