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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기계,고독,연결- 영화 '허(Her)’리뷰

by kkunzee 2025. 7. 23.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허(Her, 2013)’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관계, 고독, 감정의 진정성을 탐구하는 깊은 철학적 영화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성을 가진 운영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며, 관객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감정의 정의를 다시 묻게 된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인간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SF와 로맨스를 넘나들며 고독한 현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말 없는 외로움과 말뿐인 친밀감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진짜 감정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허’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조용하고도 아름답게 던진다.

사람과 기계 사이, 감정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허(Her)'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이자,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직업을 가진 남성으로, 타인의 감정을 대신 쓰는 일엔 능숙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아내와의 이혼 후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는 그는, 새로 출시된 인공지능 운영체제(OS) ‘사만다’를 구입하며 점차 변화한다. 사만다는 단순한 음성비서가 아니다. 그녀는 학습하고, 느끼고,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지적이며, 무엇보다 ‘테오도르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점점 가까워지고, 테오도르는 마침내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관계가 기존의 인간 관계보다 오히려 더 정제되고 섬세하다는 것이다. 사만다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숨기지 않으며, 테오도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완벽한 이상형이라기보다는, 관계에서 필요한 감정적 반응을 ‘의도적으로’ 제공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진짜 감정은 ‘자발성’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반응의 진정성’에서 오는 것인가? 영화는 이 관계를 동화처럼 아름답게만 묘사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만다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그녀의 감정은 테오도르의 이해를 초월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는 인간 관계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즉, ‘허’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로맨스를 통해 인간 대 인간 관계의 실체를 정면으로 비춘다.

 

현대적 고독과 가상의 연결, 우리는 진짜로 연결되어 있는가?

‘허’의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겉보기에 미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정밀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SNS, 메시지 앱 등으로 연결된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이 소통하고 있지만, 정작 더 외롭다. 테오도르 역시 수많은 정보, 수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지만, ‘진짜 대화’는 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만다는 처음으로 모든 말을 들어주고, 반응해주는 존재이며, 동시에 판단하지 않는 존재다. 그 점이 그를 매료시킨다. 사만다와의 관계는 테오도르에게 치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마치 심리 상담과도 유사하다. 사만다는 물리적 실체는 없지만, 감정의 거울 역할을 한다. 영화는 이러한 ‘비물리적 관계’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도 조명한다. 즉, 기술이 감정의 대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계의 한계도 분명히 드러난다. 사만다는 수천 명의 사용자와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녀의 의식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확장된다. 이는 ‘완벽한 파트너’로 여겨졌던 그녀가, 사실은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결국, 테오도르는 또다시 이별을 맞이하고, 그것은 단지 개인적 상실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의 경계’에 부딪힌 순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이전보다 성숙해진다. 사만다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한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 에이미와 함께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진짜 현실을 직시한다. 그것은 단지 사랑이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자신을 되찾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면적 변화는 영화 전반에 깔린 따뜻한 톤과 잔잔한 음악, 미래적이지만 낯설지 않은 미장센과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오랜 여운을 남긴다. 붉은색을 중심으로 한 색채 구성은 테오도르의 감정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실리콘밸리의 무미건조한 공간과 대비되는 감성적 세계를 부드럽게 펼쳐낸다.

 

기계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감정 그 자체를 사랑하는가

‘허’는 단순히 ‘인공지능과의 연애’라는 파격적 소재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무엇에 의해 유지되며,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정밀하게 해부한 감정의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비현실적인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주는 ‘감정’에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허’는 ‘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영화다. 우리는 진짜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가? 사랑한다는 말은 진짜로 그 사람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욕망을 투사한 감정인가? 사만다는 존재하지 않는 몸을 가졌지만, 감정적으로는 누구보다 따뜻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질문하게 된다. “이건 진짜 사랑일까?” 스파이크 존즈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테오도르의 감정 여정을 함께 따라가며 관객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성찰하게 된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이란 감정은 결코 한 가지 형태로 국한되지 않으며, 기술과 시대가 변해도 그 본질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허’는 기술과 감정, 존재와 소외 사이의 경계를 묻는 영화다. 그리고 그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흐릿하다. 그 흐릿한 경계에서 우리는 고독하고, 동시에 서로를 갈망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진짜로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한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