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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추적/영웅 없는 혁명, 영화‘1987’

by kkunzee 2025. 7. 22.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격동기를 조명한 작품으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변곡점을 스크린 위에 힘 있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특정 영웅이나 단일한 시선을 좇지 않고, 이름 없는 시민들과 기자, 검사, 교도관, 대학생 등 각자의 위치에서 진실을 향한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체제의 폭력성과 억압을 드러내는 동시에, 변화는 한 명의 거인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전달하며, 관객에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그 시대에 무엇을 했을 것인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그 말로 시작된 진실의 추적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한다. 경찰은 단순한 질식사라며 사건을 축소하려 하지만, 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은 곧 의심을 불러오고, 한 검사와 기자, 그리고 양심적 교도관, 민주화운동가들의 노력 속에서 진실은 서서히 드러난다. ‘1987’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수의 조각들이 모여 만든 진실의 구조물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없다. 오히려 영화는 다양한 인물군이 등장하며, 각자의 시선에서 시대를 응시한다. 박종철 사건을 은폐하려는 박처장(김윤석)과 안기부 요원(박희순), 진실을 밝히려는 최 검사(하정우), 진상 보도를 시도하는 윤 기자(이희준), 그리고 조용히 옆을 지키던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변화의 물결에 각성하는 대학생 연희(김태리)까지. 이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일부이며, 그 시대를 바꾸는 주체였다. 감독은 이런 구조를 통해 민주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단일한 영웅의 등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용기’의 연쇄로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다소 무거운 리듬으로 진행되지만, 그 무게감은 오히려 관객에게 ‘이것은 단지 영화가 아니다’라는 자각을 일으킨다. 1987년은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해의 공기를 기억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시기를 접해왔다. ‘1987’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그 시기의 감정과 맥박, 공포와 희망을 복원해낸다. 거리로 뛰쳐나가는 대학생들, 동료를 보호하려는 교도관의 눈빛, 신문 지면을 뚫고 나오는 진실의 단어들. 이것들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의 확장이다.

 

영웅 없는 혁명,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

‘1987’의 가장 큰 미덕은 특정 인물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시선과 계층의 교차를 통해 사건의 복합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경찰과 검찰, 진실을 좇는 언론인,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학생과 시민까지. 이들은 모두 사회의 축소판이며, 각자의 이해관계와 신념을 품고 있다. 최 검사(하정우)는 정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특정 순간 결정적인 선택을 한다. 그는 박종철의 부검 시신을 은폐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언론에 사실을 흘린다. 그 한 줄의 선택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윤 기자는 신문사의 압박 속에서도 끝까지 기사를 쓰며, 정보 제공자와 함께 목숨을 건 싸움을 이어간다. 교도관 한병용은 정치범에게 몰래 라이터를 건네며, 무언의 연대를 실천한다. 대학생 연희는 처음엔 무관심했지만, 진실 앞에서 자신의 무지와 마주하며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서사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이 시대의 어느 자리에 있었을 것인가?” 이 영화는 단순히 ‘옳은 편에 서자’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선택은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거나 외치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근본적 자세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또한 영화는 체제의 억압을 무겁게만 그리지 않는다. 진실을 마주한 사람들의 작은 유머, 뜨거운 우정, 예상치 못한 울림의 순간들을 담으며, 그 시대를 단순히 고통의 서사로 국한하지 않는다. 시대는 가혹했지만, 그 안에 살아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따뜻했고, 인간적이었다. ‘1987’은 그 온기를 기억하게 만든다. 6월 항쟁의 클라이맥스 장면은 영화의 정점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과 경찰의 대치, 최루탄과 구호, 피와 땀 속에서 서로를 부여잡는 사람들의 표정. 이 장면은 역사 기록의 재현을 넘어, 감정적 해방의 순간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과거의 거울 속에 현재를 비춘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1987은 언제인가

영화 ‘1987’은 엔딩 크레딧 직전, 실제 박종철과 이한열의 사진, 당시 시위 영상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삽입한다. 그것은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이 아니라, 영화와 현실이 맞닿는 경계의 붕괴다. 관객은 극장을 나오면서도 그 질문을 안고 나온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이 영화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1987년은 끝난 해가 아니다. 권력의 감시, 언론의 자유, 시민의 연대, 그리고 민주주의의 실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과거의 감정을 전달하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각성을 유도한다. 감독 장준환은 섬세한 연출로 무거운 주제를 균형감 있게 이끌어 간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각 장면이 주는 울림은 깊다. 무엇보다 영화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을 다시 부른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 그들은 역사의 뒤편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일상과 권리를 만든 주체다. ‘1987’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군 시대를 기념하는 동시에, 그 기억이 단지 과거로만 남지 않게 하려는 시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크고 작은 불의와 마주하고 있으며, 여전히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선택이 바로 다음 ‘1987’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외친다. “기억하라, 행동하라.” 그리고 묻는다. “당신의 1987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