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일라잇이 남긴 로맨스의 클리셰와 그 시대의 감성
2008년 개봉한 ‘트와일라잇’은 뱀파이어와 인간 소녀의 금기된 사랑을 다룬 로맨스 판타지 영화로, 당시 10대와 20대 여성층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열광의 이면에는 수많은 로맨스 클리셰가 반복되고 있으며, 이 영화는 오히려 ‘클리셰의 박물관’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상징적인 흐름을 지녔다. ‘트와일라잇’이라는 현상을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시대의 감성과 클리셰의 작동 원리를 들여다본다.
한때 세상을 뒤흔든 뱀파이어 로맨스, 그 시작
2008년, 미국 청소년 문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스테프니 메이어의 소설 『트와일라잇』이 영화화되며 전 세계 젊은 관객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당시만 해도 판타지 로맨스 장르가 아직 ‘틴 무비’로 분류되어 주류에서 다소 비껴나 있었지만, ‘트와일라잇’의 흥행은 그 경계를 허물었다. 뱀파이어라는 신비한 존재와 평범한 인간 소녀 간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수많은 십대들의 환상을 자극했고, 낭만주의적 감성과 위험한 사랑이라는 이중적 긴장은 영화에 긴밀한 몰입감을 부여했다. 여주인공 벨라 스완(크리스틴 스튜어트)은 내성적이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워싱턴주의 포크스라는 음침하고 흐린 마을에 이사오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수수께끼의 소년 에드워드 컬렌(로버트 패틴슨)은 알고 보니 뱀파이어였고, 그와의 만남은 벨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금기, 위험, 열망, 보호 본능 등 다양한 로맨틱 요소를 복합적으로 뒤섞어 관객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가 흥행과 팬덤 면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만큼, 그 서사와 캐릭터는 다양한 비판에도 직면했다. 특히 지나치게 전형적인 여성상, 의존적인 관계, 비현실적 판타지 설정 등은 오늘날의 시선에서 볼 때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트와일라잇’은 그 시대가 원했던 로맨스의 이상형을 정확히 반영한 작품이었으며, 로맨스 장르 클리셰의 교과서로 남아 있다.
‘트와일라잇’ 속 클리셰, 그리고 그 작동 방식
‘트와일라잇’은 고전적인 로맨스 공식들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먼저, ‘금지된 사랑’이라는 서사는 로맨스 장르의 가장 강력한 흡입력 중 하나다. 인간과 뱀파이어의 관계는 물리적 한계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극단적인 설정은 관객에게 더욱 강한 감정 이입을 유도한다. 에드워드가 벨라의 피 냄새에 끌리면서도 그녀를 해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위험하고 동시에 숭고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남성 캐릭터의 ‘강력하지만 상처 입은 보호자’ 이미지도 반복된다. 에드워드는 초인적인 힘과 불사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벨라에게만은 언제나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구원자이자 상처 입은 영웅’이라는 클리셰를 따른다. 그는 벨라를 끊임없이 지키려 하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그녀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벨라는 오히려 위험 속으로 더 깊이 끌려들어간다. 셋째, 벨라는 ‘무력하지만 특별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녀는 외모나 성격 면에서 그리 도드라지지 않지만,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끌리는 설정은 또 하나의 로맨스 클리셰이다. 이 구조는 독자가 자신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도록 의도된 결과이며, 특히 여성 독자들이 벨라를 통해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넷째, 삼각관계는 시리즈 내내 지속되는 주요 동력이다.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이라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며, 벨라는 에드워드와 제이콥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역시 ‘두 남자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익숙한 로맨스 클리셰의 반복이며, 각 캐릭터는 상반된 매력을 대표한다. 하나는 이성과 절제를, 다른 하나는 본능과 열정을 상징한다. 이처럼 트와일라잇은 수많은 클리셰를 단순히 차용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감성과 정서를 반영하여 그것들을 강화시켰다. 그렇기에 팬덤은 열광했고, 비판자는 질타했으며, 대중문화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클리셰인가, 상징인가? 트와일라잇의 문화적 유산
오늘날 ‘트와일라잇’을 다시 보는 많은 이들은 그 서사의 전형성과 비현실성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클리셰의 나열로만 평가하긴 어렵다. 이 영화는 2000년대 후반을 살아가던 젊은이들의 로맨스 판타지를 대변했고, 특히 여성 중심의 주체적 감정을 스크린에 올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물론, 현대의 시선에서는 벨라의 의존적인 태도나 관계의 불균형성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트와일라잇이라는 작품이 담아낸 ‘그 시대의 감정 코드’이기도 하다. 영화는 환상적인 존재를 통해 도피적인 사랑을 그리지만, 동시에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클리셰란 결국 반복되는 만큼, 그 시대가 끊임없이 원했던 정서를 반영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결국 ‘트와일라잇’은 로맨스 장르의 단면이자, 2000년대 문화 트렌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미진하거나 불균형해 보이는 서사라도, 그 안에는 당시 수많은 이들의 감정과 바람이 녹아 있다. 비판과 조롱 사이에서도 이 작품은 여전히 회자되며, 후속 로맨스 콘텐츠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트와일라잇은 단순한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한 문화적 기록이며,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가 어떻게 시대에 따라 변주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여전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