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 감독의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은 1979년 10·26 사건, 즉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한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정치 스릴러이다. 김충식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여,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40일을 고도의 긴장감 속에 풀어낸 이 영화는, 권력 내부의 밀실 정치와 인물 간의 심리전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실존 인물들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실제와 허구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날의 선택’이 갖는 무게를 끊임없이 곱씹게 만든다. 영화는 단지 역사적 재현을 넘어서, 권력이라는 무형의 유혹과 그것이 낳는 파국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권력의 중심, 남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남산의 부장들’은 1970년대 말, 독재 정권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중정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중정부장 김규평(이병헌)을 중심으로, 대통령 박통(이성민),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미국으로 망명한 전직 부장 박용각(곽도원) 등 각 인물들이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처음 김규평은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가장 신뢰받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정권 내부의 균열, 곽상천의 등장으로 인해 균형은 급격히 흔들린다. 특히 박용각이 미국에서 정권의 실상을 고발하는 인터뷰를 하면서, 외교적 압박과 내부 혼란이 동시에 밀려온다. 이 혼란 속에서 김규평은 점차 박통과 곽상천 사이에서 고립되기 시작하고, 대통령의 신뢰를 잃은 순간 그는 자신이 도리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우민호 감독은 이 긴장감을 느릿하지만 섬세하게 끌어간다. 영화의 초반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묵직한 대사와 클로즈업 위주로 구성되며, 인물들의 내면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남산 중정부 청사와 청와대의 실내 구조, 권력자들이 앉은 테이블의 배열, 시선 처리 등을 통해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 모든 연출은 관객을 권력의 밀실 한가운데로 초대한다. 중정부장이자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인물이 어째서 대통령을 향해 총을 겨누었는가. 영화는 이 질문을 중심에 두고, 단지 ‘쿠데타’나 ‘배신’이라는 단어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적·정치적 갈등을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권력’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시험하고 무너뜨리는, 유령 같은 존재임이 드러난다.
불신의 정점, 권력이 만든 괴물의 초상
‘남산의 부장들’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장면들은 총성이나 격렬한 대립이 아닌, 조용한 대화와 침묵 속에서 탄생한다. 김규평과 박통, 혹은 김규평과 곽상천 사이의 회담, 식사 자리, 동행 장면들은 말보다 시선, 분위기, 호흡으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김규평은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관료로, 체제를 유지하는 이성적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체제 내부에서 ‘충성’이란 언제든 의심받을 수 있는 유약한 개념임을 알게 되면서, 그는 서서히 달라진다. 특히 곽상천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김규평은 스스로가 체제의 소모품이자 ‘버려질 존재’임을 직감한다. 이 시점부터 김규평의 판단은 감정과 결단으로 기울기 시작하며, 영화는 그 내면의 균열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또한 영화는 언론, 정보, 외교 등 권력의 작동 방식을 치밀하게 재현한다. 박용각이 미국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장면, 미국 대사관과 중정부의 긴장관계, 국무총리의 거수기 역할 등은 권력이 어떻게 자기 보존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고, 내부의 이견을 제거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감독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인간 김규평의 고뇌와 분노, 절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는 대통령을 향한 개인적 원한이 아닌, 체제 전체의 부패와 권력 집중이 낳은 결과로서의 결단을 내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지막 총성은 단지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여온 불신과 압력의 폭발인 셈이다. 배우 이병헌은 김규평이라는 복합적인 인물을 절제된 감정 속에서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눈빛 하나로 전달되는 분노, 실망, 긴장,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결연함은 ‘배신자’도 ‘영웅’도 아닌, 한 인간의 최후의 선택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우리가 지켜보지 않았던 권력의 끝, 질문을 남기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단지 그것을 재연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 심리, 판단, 갈등을 통해, 권력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를 묻는다. 이 영화가 특히 강력한 이유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정상적인 방식’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가 체제 유지를 위해,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동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서로에 대한 감시와 제거, 그리고 파국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 지점을 통해 말한다. ‘선의로 구축된 권력도, 언제든 폭력의 기제가 될 수 있다’고. 10·26 총성 이후, 김규평은 담담하게 권총을 내려놓는다. 그 장면은 영화적 클라이맥스인 동시에, 권력의 무게를 짊어진 한 인물이 자신의 책임을 마감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그 순간 단지 역사적 사실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왜 그는 그 선택을 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민호 감독은 이전에도 ‘내부자들’, ‘더 킹’ 등을 통해 권력의 구조를 날카롭게 해부해왔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 연장선에서, 가장 극적인 한 장면을 통해 전체 시스템의 부조리를 정조준한다. 이 영화는 단지 과거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권력 구조, 조직 문화,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강력한 반영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결국 말한다. 권력은 절대 침묵 속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감시하지 않을 때, 반드시 비극은 반복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영화를 본다.